안녕하세요
뉴비 역사맨입니다 ㅎㅎ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1646년(인조 24년) 2월 9일기사
참고로 조선의 임금도 사람이므로 살면서 욕설을 했지만,
공문서인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사관이 어느 정도 필터링으로 걸러서 표기했다.
보통 '차마 듣지 못할 하교', '주상께서 대노하며'라고 둘러대는 형태.
욕의 수준이 '더벅머리 선비놈'과 같이 나름 적절하다 느껴질 경우에는 그대로 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록에서 대놓고 임금이 개새끼라고 그대로 욕을 한 건 실록 전체를 통틀어 인조가 유일하다.
어쩌면 사관이 걸러서 표기한 것조차 저 정도이고,
실제로는 누가 듣기에 거북한 더 심한 욕이었을 수도 있다.
-나무위키
실록에, 임금이 '개새끼'라고 욕했다고 기록된건 인조가 유일.
그냥 상상이상의 개차반.
반정 때, 그 명분으로 광해군의 외교 정책 담당하던 신하들을 싹 죽여버리죠.
정작 집권한 후에는 명나라로부터 1년 가까이 추인도 못받고,
전쟁은 못하겠으니 오락가락하며 양쪽으로 눈치보다가
병자호란 털린 이후로 후금 요청으로 오히려 조선 군대가 명나라 군대 죽이고 다녔죠.
영창대군 죽인 광해군과 자기는 다르다면서, 광해군과 광해군 딸 등 다 살려주고 대우도 해줬는데,
자기 며느리와 손자는 왜 그토록 미워하고, 못 잡아 먹어 안달이었는지
아이러니한 것은 삼전도의 굴욕 이후로 척화파가 하도 인조에게 뭐라고 하고, 두 아들과 수양 딸, 신하들, 주변 사람 전부 청나라로 끌려갔던 시기라 인조도 청나라 눈치를 보느라 강경과 대화 양쪽이 비교적 균형이라도 잡혀 있었는데,
봉림대군 효종이 왕으로 등극하면서, 조정에 주화파는 싹 실권하고 북벌에 반대하지 않는 신하들로만 채워졌죠.
그 대표적인 인물이 우암 송시열이고, 조선사회가 흔들릴 때, 예학을 퍼뜨려, 효부, 열녀, 정절과 효성만 강제하고 강요하던 시기로 만들어 버립니다. 선비들도 주자학에 매달리고요.
집권한 서인 세력들이 대동법 확대 실시나 세수 부족으로 인해 노비를 줄이고자 시도했던 점이나 임진왜란 이후 민생 안정 차원에서 여러가지 노력한 점들도 분명 있지만,
좋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런 이유들인 것 같습니다.
국방도 외교도 똑바로 못해 전쟁을 겪게 한 것은 양반 사대부들인데, 환향녀라며 끌려갔던 여성과 아이들이 엄청 고초를 겪었죠. 조선을 위해 자처해서 청나라 갔던 공주도 박대하고요.
그리고 운명의 장난인지 이후에도 소현세자처럼 청나라에서 서양 문물 도입에 관심있던 인물들은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서인 유력 가문 중에서도 그런 인물들이 있었는데, 재수없게 정쟁에 휘말려 가문이 날아가죠.
똑같은 답답한 유교사회라도 그나마 전기처럼 어느 정도의 실리는 통용되던 시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조선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다소 궁금한 대목입니다.